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왕비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습니다. 1755년에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15번째 자녀로 태어난 그녀는 1770년에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프랑스 혁명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793년에 단두대에 올라가기 전까지 그녀의 삶은 많은 오해와 비난, 루머와 조롱에 시달렸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낭비를 즐기는 왕비로 비판받았지만, 실제로는 당시 다른 왕비들과 비교했을 때 평균 수준의 소비를 했고, 프랑스 왕실 예산의 10%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녀는 냉혈하고 무정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루이 16세가 쏜 활에 맞은 농민을 손수 치료해주기도 했고, 마차를 몰 때 소작농 밭을 망치지 않도록 밭을 비켜가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고, 하프 연주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렇게도 비방받았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오랜 적국이었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녀를 '오스트리아의 비둘기'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그녀는 루이 16세와의 결혼이 정략적이었기 때문에, 그와의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고 의심받았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결혼 후 7년 동안 자녀가 없었고, 이는 남편 루이에게 신체적 결함이 있어서 부부간에 실질적인 동침이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의 작은 별궁인 티아노 궁전에서 시골 생활을 즐기거나,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왕실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낭비하고, 놀고 먹는 왕비로 비치게 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에 대한 오해와 비난을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책을 썼지만, 그 책은 혁명의 선동자들에 의해 불태워졌습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혁명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프랑스의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이는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반역과 배신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 혁명의 희생양이 되어, 가족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감옥에 갇혔고, 단두대에 올라가기 전까지 고문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비극적이고 비참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왕비로서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했고, 오스트리아의 공주로서 고향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옹호하고 변명할 수 있는 기회도 없이, 단두대에 올라가기 전에 자신의 발을 밟은 사형집행인에게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목은 날카로운 도끼에 의해 잘려났고, 그녀의 머리는 군중에게 보여졌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루이 16세의 시신과 함께 생드니 대성당의 무명묘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1815년,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들의 유해는 생드니 대성당에서 꺼내져 생드니스 궁전의 왕실 묘지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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